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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어디에 있는 거죠?”
“…….”
그들에게 무언가를 묻는다는 사실조차 께름칙했지만, 메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처의 카스토드에게 마르세우스가 어디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대답을 바란 물음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의미 없는 행동이라도 하는 것이 메렌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킨다. 황궁에 붙잡혀 들어온 후로 메렌은 마르세우스가 부르지 않으면 머물고 있는 방에서 나오는 일이 없었다. 아니, 마르세우스가 끌고 나간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언제, 누가, 무엇을 목적으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메렌은 항상 경계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는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메렌은 이곳에선 항상 기계 부품이 불편하게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몸을 옥죄는 공기가 사라졌다. 처음으로 스스로 방 밖으로 나갔을 때 황궁에 그 순간 인기척이 사라졌다는 것을 메렌은 확실히 느꼈다. 황궁에 남아 있는 카스토드들은 인기척을 내지 않는 존재였다. 카스토드는 항상 모든 곳에서 실체가 없는 허공의 무언가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그것뿐으로, 서로 어떠한 소통도 하지 않았다. 오직 각자 자신이 감각할 수 있는 것들만을 보고 듣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 안에는 궁의 대리석 장식, 집무실의 잉크병, 그리고 카드 매지션 등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자신을 감시하는 황궁 안에서 메렌은 지금이야말로 방해 없이 황궁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가졌다. 기분 나쁜 경험이 심긴 공간이지만 이곳을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메렌을 사로잡았다. 메렌은 금실로 테두리에 자수를 넣은 카펫을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두툼한 카펫을 밟으며 이런 카펫 위를 걸어 다니니 인기척이 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이곳에 진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메렌 자신을 포함해서.
* * *
동방의 몰락한 왕조였던가. 메렌은 언젠가 9999개의 방이 있는 고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 끝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긴 복도를 걸으며 메렌은 그란데레니아 황궁의 방은 과연 몇 개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50걸음마다 방이 한 칸, 지금까지 복도에서의 걸음 수는……. 메렌의 발길은 커다란 나무 문 앞에서 멈췄다. 용도를 알 수 없는―메렌이 갇혀 지내는 방과 같은 방들이 수십 개가 늘어선 복도에서, 부조로 장식되어 높이가 천장에 다다르는 문은 단연 메렌의 시선을 끌었다. 과거의 황제를 기리는 방이라고 해야 그러한 화려함에 수긍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카스토드를 본 것은 수백 걸음 전이었다. 메렌은 조심스럽게 나무 문을 열었고, 경첩은 부드럽게 소리 없이 돌아갔다. 메렌의 손은 책을 읽고 있는 여인의 부조를 밀고 있었다.
제국의 서고는 그가 생각해왔던 책들의 눅진한 냄새로 차 있지 않았다. 제국 이전의 공화국, 공화국 이전의 도시의 역사가 잠든 장소는 오히려 메렌이 보았던 황궁 안의 어떤 장소보다 산뜻했다. 황혼도 저물고 있을 때의 빛이 서고의 창으로부터 들어와 선선한 기운마저 돌고 있었다. 메렌은 서고의 중앙으로 다가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서고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목이 뻐근해질 때까지 쳐다보아야 간신히 그 방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가 눈에 잡혔다.
목 부분의 관절에 무리가 올 것 같다는 뻐근한 느낌에 메렌은 고개를 바로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고의 부분들이 메렌의 눈에 잡혔다. 책장을 가득 채운 책들의 등은 제각기 다른 모양이었지만 하나도 빠지지 않고 느껴지는 고급스러움이 책장을 안정되게 보이게 했다. 메렌은 이 모든 책들을 모으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마르세우스가 이 책들을 손수 모아 꽂아두었다고 생각하기에는 황제로서 너무 바빠 보였고, ‘그 외의 일’로 이런 데에 신경 쓸 겨를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카스토드들이 황제를 호위하고 있었지만 먼저 나서서 책을 모으고 정리를 할 적극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메렌은 기왕 황궁에서 다시 언제 생길지도 모르는 여유를 얻었다면 잠시 서고에 머무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메렌이 읽을 수 있거나, 또는 흥미를 가질 만한 주제의 책들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황궁의 누군가가 이곳에 온다고 해도 서고의 중압 속에서 메렌에게 해를 끼칠 정도로 시의를 가리지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메렌은 다시 서고의 문쪽으로 돌아가 눈높이의 책장부터 훑어보기 시작했다. 책등은 정말 여러 가지 형태들이었다. 빛바랜 푸른색의 책등은 종이가 벗겨져 가장자리부터 칙칙한 내지가 드러나 보였고, 진홍색 책등에는 표지에 금박이 들어가 흐릿하게 메렌의 모습이 비쳤다. 얼굴에 그려진 문신 정도만 윤곽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비추는 금박이었지만, 메렌은 혼자 별 걱정 없이 거울을 본 순간이 황궁에 들어선 이후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마음이 한층 더 차분해졌다. 황궁에도 점점 밤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메렌이 알아볼 수 있는 책의 제목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메렌은 그 정황―그란데레니아 제국도, 오토마타를 만들던 황혼의 시대 엔지니어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이 오래되고 수많은 양의 장서들이 한 종류의 글로 쓰여 있다는 사실에 자못 놀랐다. 그리고 그것들을 메렌이 모두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다시 서고의 한가운데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메렌은 독서대 위에 놓인 책을 보았다.
“카드 게임의 법칙……?”
갈색 표지에 초록색 띠지가 박힌 익숙한 책이었다. 제국의 서고에 있는 책이 메렌이 포르투나에서 읽던 그 책이라고 확신을 줄만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분명히 메렌이 침대맡에 두고 항상 카드를 꺼내 들며 읽던 책이었다. 카드매니플레이션. 메렌의 책이었다면 가장 닳아 있을 페이지가 빳빳하게 펼쳐 있었다. 메렌은 지금까지 만진 카드의 수보다, 아니면 보아 온 관객의 수보다 많은 것들을 황궁에서 만났었다. 제국이 마르세우스의 손 안에서 펼쳐지는 카드 마술의 하나이고, 자신은 거기에 소모되는 소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메렌은 찬찬히 책장을 넘겨보았다. 익숙한 과거의 정보들이 메렌의 기억회로의 틈을 메워 갔다. 책 위에 올라간 손이 아쉬운 듯 카드 대신 종잇장을 만지작거렸다. 플레잉카드를 방에 두고 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황제와 카드 게임의 승부만을 두고는 메렌이 가진 카드 기술을 뽐내기에 한참 부족했었다. 책에서 무언가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메렌이 주워드니 뒷면에 나팔 부는 천사가 그려진 하트 에이스 카드였다. 카드 매지션에겐 한 장의 카드면 모든 것이 충분했다. 메렌은 읽고 있던 책에 책끈을 끼워두고 책을 덮었다. 서고의 한가운데서 메렌이 허공으로 팔을 내젓자 메렌의 손 안에서 하트 에이스를 시작으로 카드가 쏟아져 나왔다. 이제는 완연한 달빛을 받으며 카드가 반짝거리다, 일순간 바닥에 모두 떨어졌다.
"귀공 홀로 보내는 한밤의 유희는 만족스러운가?"
"마르세우스!"
제국이 기척도 없이 메렌의 등 뒤로 다가와 물었다.
"카드 게임의 법칙……. 이런 책을 보고도 우리를 이기지 못 했다면 귀공에게 이런 책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이지?"
"……설령 게임에서 지더라도 다음 게임에서 지지 않기 위해선 게임의 방식을 숙지해 놔야 합니다."
"귀공이라면 이 책 따윈 보지 않아도 게임의 룰은 숙지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귀공은 일부러 우리에게 져 준 것이 아닌가? 패배의 결과가 어떠할지는 미루어 짐작했을 텐데도?"
분명 마르세우스는 메렌을 내려다 볼 위치에 있지 않았음에도, 메렌은 황제가 자신을 내려다 보며 웃는 것을 보고 몸을 떨고 있었다.
"무슨 그런 말을!"
"그렇다면 귀공에게 카드 매지션은 지나친 이름이 아닌가? 카드에 관해서라면 최고라고 자부한다던 자도 결국 패배할 뿐이라니, 공의 쓸모도 거기까지인가 보군."
"저는……!"
"걱정할 필요 없다. 우리는 떠돌이 오토마타에게 그렇게 가혹하게 대하지 않는다. 원한다면 귀공이 원하는 용도로 아예 거두어 줄 수도 있어."
"마르세우스, 나는……! 나는 당신이 원하는 용도로……!"
마르세우스를 바라보는 눈이 흐린 메렌이 소리쳐 항변했지만, 마르세우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마르세우스는 옆에 놓인 갈색 책표지를 어루 만지며 말했다.
"우리가 공을 위해 준비한 환대는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군."
* * *
"받은 환대에 그대가 충분히 응해 주었으면 좋겠어."
바닥에 떨어진 카드들을 밟으며 마르세우스는 서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서고 한가운데 주저앉아 버린 메렌은 여전히 황궁 안에서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